명동성당...소도의 역할은 역사 뒤안길로

성지순례 2019. 6. 10. 16:25

한때 민주화의 성지로 통했던 서울 명동성당. 이젠 내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명동성당 대성당의 왼쪽이 교육관이다. 운동권 투사들의 점거 농성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고색창연한 명동성당 대성전. 


명동성당 교중미사(일요일 12시)에 참석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미사 시작 40~30분전부터 대기행렬이 생긴다고 한다. 



명동성당 대성전 뒷편에 있는 성모마리아상. 



성모마리아상 왼쪽에는 초를 봉헌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초 한 개에 1천원 이상. 



명동성당 대성전 오른쪽에는 꼬스트 홀이 있고, 그 끄트머리에 영안실이 있다. 꼬스트(코스트)는 한국 최초의 약현성당에 이어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사람이다. 사진 속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는 곳의 왼쪽이 상설 고해소다. 옛 계성여고 건물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고해소와 가톨릭 문화아카데미가 나온다. 


명동성당에 올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고 조성만 열사다. 그는 1988년 5월 13일(주일) 오후 3시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 후 투신자살했다. 그의 투신과 운명(15일 오후 7시 30분, 백병원 영안실)을 지켜봤던 한 사람으로서 비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31년 전 그는 "양심수를 석방하고,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다 스스로 묵숨을 끊었다고 보도됐다. 하지만 그는 '광주학살 진상 규명'도 절규했다. 고인은 1964년생이니 살아 있다면 올해 만 55세다. 

천주교 신자였던 고 조성만 요셉 열사는 전북 전주 출신이다.  명동성당에서 산화할  당시 서울대 화학과 2학년 복학생이었다.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이었다. 숨진 뒤에는 자살했다는 이유로 장례미사를 보지 못하고 간이 장례식(사도예절)을 치러야 했다. 명동성당이 죄 많은 속죄 죄인들의 마지막 피난처, 즉 소도의 역할을 했던 그 시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애통했던 그의 명복을 빈다.    


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