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복음(Euangelion, the gospel)을 ‘아름다운 소식(good news)’, ‘기쁜 소식(glad tidings)’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복음이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죄빚의 탕감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께 빚 진 ‘채무자’에 비유한다. 이는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 ‘죄삯 사망(롬 6:23)’을 요구받고, 그것을 갚지 못한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사후 ‘둘째 사망’에 빠뜨려지는 것은 그의 ‘죄 빚’이 청산되지 못한 형벌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사죄(赦罪)의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것이 ‘죄 빚의 탕감’이다(용서는 ‘죄빚의 탕감’이다).

1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준 성경 이야기는 죄인이 갚지 못한 ‘죄 빚’을 하나님이 탕감(canceling, 蕩減)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탕감(蕩減)’은 ‘죄 사함을 위한 메커니즘(mechanism)’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냥 ‘죄 사함’을 주실 수 없기에, ‘탕감’이라는 ‘법적 수단(the Legal Mechanism)’을 동원한 것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에서 ‘탕감’을 ‘죄 용서’와 연결짓고 있음은 같은 맥락이다.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4-35)”.

그리고 이 ‘탕감’ 역시 초법적(超法的)이선 안 되기에, 그리스도가 대신 죄값을 지불하는 ‘구속(救贖)’을 통해 이뤄졌다. ‘구속’은 ‘죄 빚을 갚아준다’는 뜻이며, ‘복음’의 핵심 개념이다.

실제로 성경은 ‘죄 사함’과 ‘구속’을 동일시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택자의 죄 빚이 청산됐다(의롭다함을 받았다)’는 확증이었다(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러한 ‘죄의 구속(the redemption from sin)’은 죄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복음이다. 죄 빚을 청산한 자의 ‘자유와 기쁨’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35:10)”.

(※위의 죄 사함, 용서, 사죄는 모두 같은 의미이다.)

◈사형수를 사면해 아들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날 때부터 ‘사형 언도(롬 6:23)’를 받아 태어난 아담의 후손은 모두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이다. 사면(赦免)을 받지 않는 한, 그들 모두는 육체의 죽음 후 ‘둘째 사망(계 20:14)’에 처해진다. 이런 절망적인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망을 폐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성경은 여기서 ‘사망의 폐지’를 ‘복음’과 연관지으며,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의 ‘구속의 의’를 입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말이다. 다음 구절 역시 동일한 어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해 주는 ‘이신칭의’는 인류(사형수)에게 사면을 주기 위한 정지작업 같은 것이다. 이 선언으로 생득적으로 죄인을 옭아매고 있던 사망의 줄이 풀려난다. 인류에게 이보다 더 기쁜 복음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 사면은 단지 사형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을 넘어, ‘종에서 아들’로의 신분 변화와 함께 ‘영생’을 갖다 준다. 성경이 ‘이스마엘’과 ‘이삭’을 통해 ‘율법 아래 있는 종’과 ‘율법 위에 있는 아들’을 비교하며, 후자(아들 이삭)에게만 약속된 유업이 ‘영생’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30)”. 죄인이 사망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아들의 지위’과 함께 ‘영생’까지 유업으로 받았으니 웬 은혜인가!

이는 순전히 ‘율법의 조화(造化)’때문이다. 곧 율법이 인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의(義)’가 없어 율법아래 있는 자는 ‘종(갈 5:1)’과 ‘사형수(롬 7:5)’가 되며, 그리스도의 의(義)로 율법에서 해방되면 ‘아들(갈 4:5)’과 ‘영생의 유업자(갈 3:25-29)’가 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3-5)”.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똘똘 뭉친 ‘자아 건축자들(the self-builders)’에겐 ‘싸구려 구원(salvation for sale)’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은 전적 타락(무능)하여 구원에 기여할 것이 일(一)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아 부정자들(the self- renouncers)’에게 그것은 감지덕지할 ‘자비의 복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말은 공격자들의 비난처럼 구원을 거저 얻으려는 ‘거지 근성(a mean spirit)’의 발로에서가 아닌, 죄인이 ‘자신의 깜냥’을 헤아린 소위, 주제 파악의 결과이다. (이 점에서, ‘구원’에 ‘인간의 기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아직 자기에 대한 주제 파악을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무능을 알기에, ‘구원’을 위해 단 일(一)의 기여라도 요구 받는다면 불안과 공포심으로 곧 절망에 빠져버린다. 물론 그것은 그들에게 더 이상 ‘복음’이 아닌 ‘저주’가 된다.

그들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믿으면 하겠네(찬 343장)”와 같은 말씀들을 자기 같은 전적 무능자를 위한 ‘복음’으로 간주하며 오직 그것들에 매료된다.

이는 그들이 공격자들의 말처럼 이 말씀들 안에서 ‘값싼 구원(salvation for sale)’을 보는 것이 아닌, 죄인의 깜량을 헤아리신 ‘하나님의 혜안’과 ‘그의 자비의 은혜’를 읽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는 ‘그리스도’와 ‘믿음’만이 구원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구원론’의 결어(結語)와도 같은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는 단 하나의 유예(猶豫)도 없이 100프로 성취하여 죄인이 더 보태거나 보충할 것이 없게 했고, 죄인은 구원을 위해 믿기만 하면 되도록 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만으로 안 되고 내가 뭔가 보탤 여지가 남겨져 있다면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그런 미완성된 ‘율법적 의(義)’로는 전적 무능한 죄인을 구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이 아닌 인간을 불안과 절망에 빠뜨리는 ‘저주거리’이다. 할렐루야!

[출처] 복음은 왜 기쁜 소식인가?(이경섭 목사)|작성자 창조의 작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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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베엘제불  (0)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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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베엘제불

폭식은 악마의 대죄로 통한다. 악마의 세상에서 루시퍼 다음으로 악명이 높은 베엘제불(벨제불, Beelzebul)이 폭식을 유혹한다. 베엘제불은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이라는 뜻이다. 베엘제붑(Beelzebub)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에는 더러움의 상징처럼 여기지만, 옛날 사람들(고대 시리아 사람들)은 신전에 이 악마를 모시고 음식 등 제물을 바쳤다. 

베엘제불은 가나안  사람들이 믿었던 신 바알제불(Baal-Zebul)에서 비롯됐다. 밀튼은 명저 '실락원에서 루시퍼(사탄) 다음가는 악마 지도자로 베엘제불을 꼽았다. 그리고 지옥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베엘제불은 장중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그는  많은 강대 왕국의 중책을 맡기에 모자람이 없으며,  아틀라스 같은 어깨를 추켜세우고 현자처럼 서 있었다."

악마 베엘제불이 왜 인간들이 폭식하도록 유혹하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이런 악마의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인 데모놀로지(Demonology) 또는 사타놀로지 (Satanology)의  연구 결과 중 하나인 것은분명하다.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던 근세 유럽에서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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